그는 모릅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서 가슴 떨림에 고른 호흡하기 힘들었다는 걸. 커피 잔 들 때 바들바들 떠는 부끄러운 손 보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마시기 편한 쉐이크를 주문했다는 걸 그렇게 태연한 척 차분한 모습 보이려 무척이나 노력했던 나를 그는 모릅니다. 그를 두 번째 만난 날 들뜬 기분에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한 나 우산을 접으며 입구로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면서 주님께 작은 감사기도 드렸다는 걸 그 날 그가 너무 멋있어 보인다고 참 근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나를 그는 모릅니다. 그를 세 번째 만난 날 걷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내게 걷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던 '아빠손 말고도 편하게 잡을 수 있는 손이 또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했다는 걸 그는 모릅니다. 그를 네 번째 만난 날 내 손이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좁고 길다는 얘기에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손바닥 펴들고 요리저리 살폈다는걸 손이 차가운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를 만나러 가는 동안 내내 손을 접었다 폈다하면서 따뜻하게 만들었다는 걸 "오늘은 손이 따뜻하네." 라는 그의 말에 내심 기뻐했다는 걸 그는 모릅니다. 그를 다섯 번째 만난 날 내게 줄 선물을 준비하느라고 늦게 온 거면서 괜히 내 눈치만 보던 그. 그런 그가 너무 귀여워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택시기사 아저씨 눈 때문에 그저 창 밖만 바라봤다는 걸 눈가에 눈물이 이만큼 고였다는 걸 그는 모릅니다. 둘이 나란히 앉았던 도서관 앞 벤치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 찾았던 그 벤치였다는 걸 그 벤치에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와 있을 수 있어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걸 그는 모릅니다. 그를 여섯 번째 만난 날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 시간 내내 잠시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냥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로 대신했던 나를 그는 모릅니다. 한강을 볼 때 단 둘이길 바랬던 내게 그의 친구와의 동행은 작은 실망이었다는 걸 그는 모릅니다. 그를 일곱 번째 만난 날 그 사람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 보인 날. 눈물의 의미가 하루 종일 연락하지 않은 그를 원망하는 것도 무작정 기다린 시간이 억울해서도 아니었다는 걸. 그저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며 지쳐있던 내게 그가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그를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 올라 흘린 행복의 눈물이었다는 걸 그는 모릅니다. 그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사랑은 그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팝콘을 나누어 먹으며 영화를 보고 고속버스의 호젓함과 기차의 떠들썩함을 즐기며 하루동안의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쓸쓸함에 석양을 본다던 어린 왕자의 흉내도 내보고, 언젠가 없어질 거라는 협궤열차도 타며 이 기분 그대로 첫 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도 했습니다. 우린 참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고양이 세수를 한다는 얘기에 얼굴을 찌푸리며 나무라기도 했고, 수염이 잘 안나 일주일에 한 번씩 밖에 면도를 안 한다는 말에 남자도 아니라며 웃음을 참지 못했던 적도 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하고싶었던 일이 더 많았습니다.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누어 낀 채 안장이 두 개인 자전거를 같이 타고 싶었고, 지난 밤 술이 덜 깬 당신을 위해 해장국을 끓이며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먹었냐는 투정도 하고 싶었습니다. 여름이면 등목을 해주고 싶었고, 늦저녁부터 눈이 오는 겨울날이면 당신을 위해 대문 앞 골목을 쓸고싶었습니다. 가장 아끼는 옷을 입고 시장어귀 사진관에서 사진도 찍고 싶었습니다. 사진관 주인은 어쩌면 참 행복해 보인다는 이유로 우리 사진을 진열장에 전시할지도 모르죠. 토라지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고 몇 번씩 헤어지기도 하면서 사랑을 튼튼하게 키워가는 상상도 했습니다. 당신과 하고싶었던 일이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쉽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내가 지내왔던 많은 날들 중에서 가장 행복했고 또 가장 소중했던 시간들이었으니까요. 생각만으로도 웃음지워지는 상상만으로도 떨려오는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습관처럼 텅 빈 공원을 걸었습니다. 문득 구석에 있는 공중전화를 발견하고 수화기를 집어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습관처럼 전화를 걸려했죠. 그 누군가는 이미 내 곁에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난 어렸을 때를 기억합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주 어렸을 때 말이죠. 엄마 곁에 누워 잠이 들었었죠. 한참을 자고 일어난 후에 곁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슬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큰 소리로 한 없이 울었드랬습니다. 그와 헤어진 후에 마지막이라는 말을 참 많이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막이라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깨닫게 되었고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직도 마지막이라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을 알지 못합니다. 내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습니다. 더 슬픈 존재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렇게 따뜻하고 눈물이 나올 만큼 나를 아껴줬던 사람입니다. 우리 서로 인연이 아니라서 이렇게 된 거지, 눈 씻고 찾아봐도 내게는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따뜻한 눈으로 나를 봐줬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눈빛이 따스했는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살아도 이 사람은 이해해주겠구나 생각 들게 해주던, 자기 몸 아픈 것보다 내 몸 더 챙겼던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한 사람입니다. 내가 감기로 고생할 때 내 기침 소리에 그 사람 하도 가슴 아파해 기침 한 번 마음껏 못하게 해주던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 그 사람 나름대로 얼마나 가슴 삭히고 살고 있겠습니까. 자기가 알 텐데. 내가 지금 어떻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을 텐데. 언젠가 그 사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있어야 한다고, 멀리 있어야 아름답다고.' 웃고 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내가 왜 웃을 수 없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과 하도 웃어서 너무너무 행복해서 몇 년치 웃음을 그때 다 웃어버려 지금 미소가 안 만들어진다는 걸. 웃고 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인연이 아닐 뿐이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 사람 끝까지 나를 생각해줬던 사람입니다. 마지막까지 눈물 안 보여주려고 고개 숙이며 얘기하던 사람입니다. 탁자에 그렇게 많은 눈물 떨구면서도 고개 한 번 안 들고 억지로라도 또박또박 얘기해 주던 사람입니다. 울먹이며 얘기해서 무슨 얘긴지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이 사람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알 수 있게 해주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렇게 따뜻하고 눈물이 나올만큼 나를 아껴주던 사람입니다. 우리 서로 인연이 아니라서 이렇게 된거지 눈씻고 찾아봐도 내게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인연이 아닐 뿐이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정말 내게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건 참 행복한 일입니다. 난 오늘도 그 친구에게 가 잃어버린 내 사랑얘기를 했습니다. 그 친군 내 얘길 말없이 들어 주었구요. 갑자기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는 내일이면 다시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한결 편안해 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지난 밤에도 당신은 내게로 와서 또 다시 잃어버린 사랑 얘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 아픔을 이겨내야 할지 당신은 내 어깨에 머리를 묻고 물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며 내일이면 다시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마음이 가라 앉아 내 뺨에 입맞추고는 그렇게 당신의 세계로 돌아갔습니다. 텅 빈 아파트를 둘러봅니다. 이제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연인들을 바라보며 홀로 걷던 공원의 산책을 나 혼자뿐인 아침식사를 그리고 혼자 보던 영화를 머리에 떠올립니다. TV가이드로 손을 뻗으며 나는 얼굴을 젖히며 흐르는 한 줄기의 눈물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대 울 어깨라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홀로 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운명인가 봅니다.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 봤던 영화였습니다. 처음 봤을 땐 스쳐지나갔던 장면이 이번엔 마음에 남았습니다 젊었을 때 만나 딱 한번 점심식사를 함께 한 남자를 사랑하느라 평생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드리지 않은 중년여인이 영화 속에서 말합니다. "나는 지금두 가끔 그때 썼던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해. 그러면 그와 함께 있는 느낌이 들지. 물론 그는 나를 잊었을꺼야. 하지만 괜찮아 내가 기억하니까?" 영화 속의 그 여인처럼 언젠가 나도 그 말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해도 그 다지 외로울 것 같지 않습니다. 평생 그리워 할 사람을 갖는다는 것도 아무에게 주어지는 행복은 아니니까요. 언제나 그리운 당신 당신이 나를 잊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기억하니까요. 이미 나를 잊었어도 괜찮습니다. 항상 내가 기억하니까요
참으로 오랜만에 당신을 다시 만났습니다. 헤어졌던 그 계절에 다시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헤어진 그 날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걸. 당신은 그 옷을 좋아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즈음이면 늘 그 옷을 꺼내 입곤 했지요. 소매 끝이 낡은 그 옷 언젠가 한 번 입어보았던 그 옷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나는 그 옷을 알아 보았고, 그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당신도 고개를 끄덕였죠. 당신의 그 행동은 내가 왜 고개를 끄덕였는지 당신도 알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죠. 우리는 나란히 걸었습니다. 그러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췄습니다. 당신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의 어깨는 한 쪽이 조금 기울어졌거든요. 그래서 뒤에서 옷을 제대로 잡아주지 않으면 한 쪽으로 기운 어깨선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절 당신을 만나면 나는 늘 옷을 바로 잡아주곤 했죠. 그 때 내 손길이 참 좋다고 말했던 기억 혹시 잊지는 않으셨나요? 참 이상한 건 당신은 내게 오기 전에도 그리고 당신이 나를 떠난 후에도 누구에게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그 행동을 당신의 어깨를 보자마자 저절로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당신은 얘기를 시작할 때면 항상 코를 징긋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참 이상한 일이라고 다른 사람과 얘기를 시작할 땐 안 그러는데 꼭 나에게 얘기를 시작할 땐 코를 찡긋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표정이 너무 방가워서 나는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다시는 못 보게 될 줄 알았던 표정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아무 설명이 없어도 서로의 지난 시간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마주보고 아무 말 없이 한참 미소만 짓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연인이란 건 하느님도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우린 헤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당신 마음속에 당신은 내 마음속에 항상 살고 있으니까요.
그인 떠났습니다 돌아오기 힘든 아주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내 허락도 없이 그렇게 그는 떠났습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내가 웃을수 있는 기억을 모두 가지고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나만 남긴채 그는 영영 떠났습니다. 눈물이 나오질 않습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저 멍하니 혼자 남겨졌따는 허무함에 가슴만 울어댑니다. 내 가장 소중했던 시간을 알고있떤 유일한 사람.. 내 가장 힘들었떤 시간을 알고 있떤 유일한 사람.. 그리고 내 유일한 사랑... 이제는 정말 만날일 없기에 이제는 정말 우연이라도 마주칠일 없기에 살아서 이별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려 주기 위해 그는 떠났습니다.
오후에 갑자기 비가 왔습니다. 창밖으로 비를 피해 뛰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오늘 우산을 갖고 나왔을까? 갑자기 내린 이 비를 잘 피하고 있을까? 비오는 거리를 보면서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당신은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왔습니다. 짙은 회색 점퍼의 모자를 꺼내 쓰면서 나에게 우산을 건내 주었을 때의 그 미소를 가슴이 떨린다는 것이 어떤 거란걸 깨닫게 해준 그 미소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미소를 떠올리다 갑자기 주체할수 없는 슬픔에 부딪혔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멍해져버렸습니다. 이미 당신은 이 세상에 없는데... 아직도 당신과 내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다니... 난 또다시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어야 했습니다. 그리움이란 사람을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 것인지 하지만 지금보다 더 어리석어 진다 한다고 해도 그리움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을 누구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에게 당신은 언제나 그리운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언제나 그리움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