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상 고전과 낭만을 잇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한 작곡가.
베토벤은 1770년 독일 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루드비히와 부친 요한도 음악가였다. 아들 베토벤을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로 키우고자 했던 요한은 어린나이의 베토벤에게 과중한 연습을 강요했다. 7살에 작은 연주회도 열었으나 그는 당대의 모차르트의 그늘 아래서 빛을 받지 못했다. 1799년 그의 스승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에게서 그는 음악공부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영향을 받게 된다. 1782년에는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면서 2년 안에 정식연주자로 자리잡는다. 1787년에는 빈으로 가서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던 모차르트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본으로 돌아와 머물다 1792년 바르트슈타인 백작의 도움으로 빈에 유학을 가게 된다. 빈에 자리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받으며 명망 있는 음악가로서 능력을 키워나간다. 1795년에는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했다. 1800년경 그는 귓병이 점차 악화되고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다. <제 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 <감람산상의 그리스도>(1803) 등의 작품이 이 당시에 작곡된 것이다. 1804년에는 <영웅교향곡>을 작곡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베토벤 자신만의 개성적인 음악스타일을 형성했다.
다음해 오페라 <피델리오>를 막에 올리지만 실패했다. 이 작품은 1814년이 되어서야 인정을 받게 된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해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경쟁적으로 간행하려고 했다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의 경우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로 <에그몬트>서곡을 작곡했다. 후에 유명해진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구체적으로 그 연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 약 10년간은 그의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졌다. 이 당시 <운명교향곡>(1808), <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황제>(1809), 바이올린 협주곡 3곡(1806), 피아노 소나타 <열정>(1805) 등 지금까지 주요 레퍼토리로 남아있는 곡들이 이 당시 작곡되었다.
1815년 이후는 그의 창작활동의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 그는 정치, 사회적으로 변화가 일어나 그의 경제적인 기반도 많이 흔들렸으며 귓병의 악화로 거의 귀가 안들리는 상태가 되었다. 1817년 이후 가장 저조한 시기를 보냈으나 1823년에는 루돌프 대공에게 바친 <장엄미사곡>과 다음해 <제9교향곡>등 대작을 발표했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해 더 발전되었고 그의 후기작품에 속하는 자유로운 형식과 낭만성은 다음 낭만주의시대를 예감케 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전형적인 고전성을 띈다면 베토벤의 작품은 형식감을 유지하면서 다이내믹의 폭을 넓혀 독자적인 음악스타일을 만들었다. 그의 후기 작품은 중기작품에 비해 다이내믹한 면이 줄어들었지만 그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정신세계의 깊이가 느껴진다. 이러한 현상은 낭만파 초기의 베버나 슈베르트의 경향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음악가로서 치명타인 청각을 잃었지만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음악에의 신중한 태도와 열정은 지금의 그를 ‘음악의 성인’이라 칭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by denke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