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나누고 싶은 네 번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상처 받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 상처주고 싶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점철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는, 그 영광스러운 신체에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요20:27). 예수님은 그 상흔을 왜 남겨놓으셨을까요? 예수님의 부활능력의 한계일까요? 저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이사야 53장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우리의 허물에 대한 나음의 대가, 우리의 죄악에 대한 씻음의 대가가 어떤 것이었는지 흔적이 필요했습니다. 그 흔적은 고스란히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신체의 흔적으로 남아, 지금도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는 ‘사랑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 받습니다. 상처 받은 사랑은 진실한 사랑을 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시기 무려 700년 전에, 예수님이 한 아기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사9:6)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신분과 정체성을 매우 명확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통치자(Government) 놀라우리만큼 따뜻하며 예리한 상담자(Wonderful Counselor), 그보다 힘이 센 존재는 없으며(Mighty God),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Everlasting Father)이시고, 평화의 왕자(Prince of Peace)라고 선포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평화의 왕자”를 “온전케 하시는 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누군가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은 그 자체가 온전한 존재일 때 가능합니다. 누군가를 살아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그분 스스로가 죽음에서 살아나신 경험이 있으실 때 비로소 누군가를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저는 매우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빚에 허덕이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만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한 가지 상흔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음악을 공부하는 것을 몹시도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음대에 진학하기 위해, 생전 처음 가출을 하였습니다. 그 행간에 많은 언어적, 물리적 압박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음대에 진학하게 되었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대학시절,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원만하지는 못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불편한 감정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기까지, 그 사이에 제 아버지와 여러 일들이 있었고, 아빠가 된 저는, 저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Everlasting Father)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저의 상처를 고치시기 위해, 당신이 상처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를 키우시기 위해, 당신이 늙어 가셨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저의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 당신의 꿈을 포기해야했던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아버지와 함께, 영원하신 아버지를 찬양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 그 영원하신 아버지를 노래하고 싶습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지금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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