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따금씩 ‘침묵’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는 (무슨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사소한 다툼으로,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과 한 달 동안이나 대화를 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아버지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가출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생 때는 하나님께 삐쳐서 기도를 중단한 적도, 심지어 잠시 동안 신앙생활을 멈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말라기에서 신약이 시작되기까지, 하나님께서도 400년 이상이나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도 한 번 마음을 돌리시면, 다시 말씀하시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시는 듯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나의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탄식했습니다(사6:9). 그리고나서 하나님께서 하신 선택은 ‘400년간의 침묵’이었죠.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대화가 오가면서도, 그 무엇인가가 바뀌지 않는다면, 대화를 하지 않는 것(침묵)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누군가에게 카톡을 보내면 “1”이 없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카톡의 내용이, 민감한 내용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받는 분 입장에서는 못 봤다는 ‘핑계’가 될 수 있겠지만, 가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침묵 또한, ‘하나의 메세지’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대화하고 싶지 않다면, 대화하고 싶을 때까지... 그의 침묵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하는 사람도, (대화를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을 위해, 적절한 시점이 오면) 그 침묵을 깨뜨려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절한 침묵의 시간들은 인격을 성숙하게 합니다. 적당한 침묵의 시간들은 서로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합니다. 합당한 침묵의 시간들은 생각의 범위를 넓고 깊게 합니다. 침묵의 시간들은 침묵하는 사람에게도, 침묵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서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침묵을 선택했던 결정도, 그 기간을 설정하는 판단도, 저의 결정과 판단은 미숙하고 이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적절하셨고, 탁월하셨습니다. 저의 미숙한 침묵을 통해서도 저는 ‘감사’와 ‘성숙’을 배우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침묵’은 얼마나 우리를 성숙하게 할까요? 이 곡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그러한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욥 3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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