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중 1집 “사 랑 이 다”
앨범 리뷰 by 강헌(대중음악평론가)
음유시인(minstrel)은 길에서 태어나 거리를 운명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시작했을 때부터 존재했을 영원한 여행자이며 자신의 땅에서조차 이방인인 자이다. 그는 남루하지만 누추하지 않으며, 지닌 것은 기타 하나 뿐이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노래 속에 담는 사람이다. 그는 친구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바람이 그가 가는 행로마다 동행한다. 그는 가진 자의 편이 아니었다. 가끔 궁정의 가객으로 초대 받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의 노래를 진정으로 사랑한 이들은 이름도 없이 살다간 가난한 민초들이었다.
대중음악의 시대가 열린 20세기, 음유시인의 혼은 포크 뮤지션, 혹은 싱어송라이터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난다. 수백 수천년에 걸쳐 전해온 풍요로운 민요의 자양분 위에 자신만의 통찰과 예술적 감수성을 얹은 소박하고 진실한 노래를 통해 이 새로운 음유시인들은 위안과 반항, 연민과 미래를 향한 꿈을 노래했다. 우디 거스리가 그러했으며 피트 시거가 그랬고, 밥 딜런이 이들의 유산을 보다 웅혼하게 확장시켰다.
이들 싱어송라이터들에 의한 포크음악은 한마디로 시장과 권력의 허위의식에 대한 ‘위대한 거절’이었고, 이 ‘거절’의 철학은 태평양을 건너 6,70년대 한국 청년 지식인들을 열광시켰다. 한 대수와 김민기가 등장하고 송창식과 김세환이 스타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이었다. 하지만 이 가객의 줄기는 90년대 김광석의 때이른 죽음과 함께 급격히 퇴조했고, 세상의 모든 시선은 아이돌 그룹의 화려한 이미지에 넋을 잃었다. 2011년 이른바 세시봉 붐이 돌연 일면서 복고의 열풍이 불었고 국민여동생으로 떠오른 아이유가 통기타를 메고 브라운관에 등장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CF의 상술이었을 뿐이다. 음유시인의 시대는 이렇게 사라지고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 초봄, 여기 낯선 한 장의 음반이 있다. 이근중이라는 생소한 이름. 그 흔한 디지털 싱글 한 장 없이 대뜸 열세곡을 담은 앨범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앨범 속으로 들어가면 놀라움이 서서히 커진다. 작사 작곡 편곡 연주가 바로 이 청년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것, 그리고 앨범의 전 곡이 아무런 어시스트 없이 통기타 한 대와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포크음악의 전성시대인 1970년대에도 이런 과감한 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나직하고 기타는 세련된 세션맨들의 매끄러운 연주와는 달리 투박하지만 어떻게든 튀어보이려 발악하는 듯한 음악의 홍수에 지친 귀를 정화시키는 투명하고 솔직한 아름다움이 첫 트랙 <그대가 그립습니다>부터 절절히 배어나온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K-pop의 열풍이 저 남미까지 미치는 이 시점에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은 이 앨범의 프로듀서를 보면 자연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앨범의 제작자는 바로 저 8,9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신화를 만든 동아기획 군단의 수장 김영인 것이다.
70년대 한국의 통기타 정신은 80년대 중반 동아기획에 이르러 계승과 도약을 경험한다. 들국화와 김현식을 필두로 시인과 촌장, 어떤날,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위대한 듀오 그룹, 그리고 한영애와 장필순 같은 개성 충만한 여성 보컬리스트들을 줄줄이 쏟아내며 동아기획은 한국 대중음악의 성숙한 발효를 단숨에 이루어내었다. 이소라와 박완규는 이 동아기획의 90년대 성과들이다.
하지만 90년대 중 후반 SM엔터테인먼트가 부상하고 아이돌 문화가 대세를 이루면서 동아기획은 서서히 침몰했고, 포크음악과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잊혀지는 것과 같이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미치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로 그 김영이 돌아온 것이다. 음악에 대한 여전한 불타는 열정과 신념을 품고.
그리고 주목할 이가 또 있다. 바로 이 앨범의 포토그래퍼 김중만이다. 김영과 삼십년 지기인 이 위대한 작가는 이미 고 김현식의 말년 앨범의 재킷과 부클릿 흑백 사진을 통해 앨범의 사진이 또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임을 증명한 바 있는 인물이다. 굳이 이 두 거장의 연대를 언급하는 까닭은 이 앨범의 주인공 이근중을 홍대 앞 거리에서 픽업하여 김영에게 제작을 권유한 이가 바로 김중만이기 때문이다.
중앙대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 있는 물리학도 이근중은 오랫동안 홍대 거리의 음유시인이었다. 통기타를 맨 이 거리의 시인을 김중만은 유심히 보았고 김영은 이 무명의 젊은이를 동아기획의 위대한, 그러나 지금은 빛바랜 리스트에 새로운 빛을 던져줄 인물로 낙점한 것이다.
이근중의 데뷔 앨범을 관통하는 정서는 고독하고 쓸쓸한 정관(靜觀)이다. 이 노래들은 현란한 모든 테크닉과 음향 효과로 도배질 되다시피한 요즘의 음악 트렌드에 비추어 보면 한 마디로 텅 비어 보인다. 목소리와 기타 이외의 공간은 어두운 침묵이다. 이것은 김중만이 인물을 묘사할 때 즐겨 찍은 모노크롬의 명암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침묵의 여백은 겉으로는 즐겁고 발랄하지만 속으로는 몇겹의 내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지금-여기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모두가 이 떠들썩한 대도시의 소외된 섬이 되는 시대의 고독한 내면이 가령 <Rain> 같은 노래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통기타 스트로크 특유의 그루브감이 돋보이는 <늦은 밤이라도 괜찮아>나 <이별> 같은 트랙에 이르러서도 이 진지하지만 박탈당한 감성은 모든 악절마다 진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근중은 함부로 흥분하지 않고 함부로 도취되지 않는다. 이 앨범의 최절정은 마지막 직전 트랙 <생각>이다. 앨범의 끝점으로 가서야 처음으로 꽁꽁 묶은 감정의 사슬을 풀어 헤치는 그 순간 우리는 슬픔의 연대를 뜨겁게 경험한다. 그리고 짧은 에필로그의 제목은 놀랍게도 <Intro>이다. 음유시인에게 길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길은 또 다시 다른 길로 이어진다.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면은 여름에 먹는 것이 아니라 한겨울에 먹는 것이다. 끝간데 없는 외로움을 아는 자만이 사랑을 통찰할 수 있음을 이 앨범은 우리에게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일러준다. 이 앨범은 열세개의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그대로 하나의 노래이다. 왜 이 프로듀서가 그리고 이 싱어송라이터가 앨범 발표 전에 신인이면 당연히 거치는 과정이라고 알고 있는 디지털 싱글을 내지 않고 요즘 풍토에 비출 때 이런 무모한 도전을 선택했는지 이 앨범을 다 듣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노래는 끝났고 주위는 조용하다. 그러나 이 노래의 첫 곡부터 다시 귀에 들려오는 것 같은 환청이 나를 감싼다.
그저 더위를 쫓으려 여름에 냉면을 먹는 이들은 이 앨범을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기다릴 것이다. 오늘 보여준 이 길 뒤에 그가 다다를 또 다른 길 위에선 이 음유시인의 정관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