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림자가 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송승범의 첫 번째 EP앨범[시뮬라크르]
그림자는 나만을 카피하지는 않는다. 내가 두른 목도리, 재킷과 어깨에 걸친 두툼한 가방부터, 지구에서 수천 만 킬로나 떨어진 해의 움직임까지 꿀꺽 받아 삼켜 어떤 표정도, 어떤 색도 지니지 않은 자신의 형태로 재구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송승범의 첫 EP앨범 [시뮬라크르]는 그림자다. 당신과 나, 그리고 이 사회가 겹겹이 입은 실루엣들을 스케치하면서 철학과 문학의 일출/몰에 따라 조금씩 자리를 옮기는. 매 음악마다 개재된 이음(異音)들은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현실의 본체와 그림자 사이를 두리번거린다. [시뮬라크르]는 바로 이 지점을 연주한다. 현 하나, 성대 한번 울리지 않은 채 오로지 미디(Midi)만으로, 샘플링만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완벽한 그림자로서, 그는 청중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발밑을 보라,고.
발밑에 매달려 있는 것은 ‘진짜 가상’이다. 인터넷이나 소설과 같은 가상세계와는 다른, 실존하는 가상으로서 그것은 여기에서 ‘진짜’를 묻는다. 이 각도, 이 실루엣을 지니게 한 당신, 내가 지니지 않은 당신의 ‘진짜 표정’은 무엇인가. 내가 새겨 넣지 않은 그대의 ‘진짜 색’은 어떤 빛깔인가.
그림자가 떠나간 꿈을 꾼 적이 있나. 이 앨범 [시뮬라크르]는 그런 꿈이다. 진중하고 무거운 제목들과는 달리 통통 튀고 발랄하게 작곡된 이 음악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간극을 내재하고 있다. 이 간극은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가상 속에 파묻혀 본체를 알지 못하는 수십, 수만의 아바타를 만들어 냈을 때, 그림자는 자신이 다가붙어야 할 발조차 찾지 못한다. 그림자의 실존은 몸이 결정한다. 그리고 주인과 하인의 변증법처럼 마치 몸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윽고 그림자가 떠나갔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시뮬라크르]를 접하면, 모순의 바다 속에 빠져들게 된다. 그것을 찰나처럼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 바다, 디딜 것 하나 없지만 모두가 서있다고 착각하는 이 세계야말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장소이기 때문이다.[시뮬라크르]는 자신도 하나의 시뮬라크르인 것처럼, 이 바다의 땅을 담담하게 연주한다. 이것이 정녕이냐, 이것이 진짜냐, 되새김질 하면서 끝내 터질 듯 터지지 않는 비트를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음악평론가 조경숙>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