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낡기보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 이이언의 솔로 1집 수록곡 ‘bulletproof’가 보이지 않는 감정의 풍경을 섬세한 사운드로 그려 온 싱어송라이터 신해경의 입술과 손끝에서 새롭게 피어났다. 원곡이 가진 서늘하고도 쓸쓸한 정서를 이어받으면서도, 신해경 특유의 꿈속을 헤매는 듯한 연출과 세밀하고 입체적인 믹싱 디테일이 더해져 청자들의 손을 붙잡고 더욱 깊은 감정의 심연으로 이끈다.
이번 리메이크 작업에서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이이언과 밴드 못(Mot)의 음악 세계를 오마주하여치밀하게 해체하고 다시 조립한 독특한 사운드 디자인이다. 신해경은 원곡 ‘bulletproof’의 건조한 드럼 하이햇과 리드 신스, 마음을 파고드는 보컬 톤을 곡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그 위에 이이언의 다른 곡인 ‘01:30 AM Coffee at a Bar’의 나른한 공기감, ‘나의 기념일’을 연상시키는 드라마틱한 신스의 여운, 그리고 못(Mot) 시절 특유의 음울한 보컬 레이어와 끝없이 확장되는 공간감을 자신의 감각으로 덧입힌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명곡을 재현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곡들 사이를 흐르던 정서와 질감을 오늘의 신해경이라는 언어로 다시 번역해 냈다는 점이다. 신해경은 오마주를 함에 있어 그저 닮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엇을 이어받고 새롭게 남길지를 명확히 선택하여 끝내 증명한다.
또한 “그저 함께 있어 줘”라는 가사의 반복은 신해경의 리메이크를 통해 더욱 아름다운 침잠으로 간절히 매달린다.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지키기 위해 방탄(bulletproof)이 되고 싶었던 오늘의 기도는, 역설적으로 신해경의 허공을 끌어안듯 몽환적인 사운드를 만나 고독한 이들에게 가장 완벽한 ‘화학적 평화’를 선사한다. 원곡의 깊이를 헤아리는 리스너들에게는 숨겨진 음악적 이스터 에그를 찾는 즐거움을, 신해경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또 한 번 그의 정교하고 세밀한 미학에 감탄하게 만드는 트랙이 아닐 수 없다.
이어지는 신해경의 새로운 트랙 ‘틈 속의 궁전’은 하나의 곡으로 완결되기보다, 선공개 싱글 의 감정을 조금씩 이월하여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이 곡들은 상실을 대하는 한 사람의 마음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이어 그린 연작에 가깝다. 에서 기억과 미련을 정리하며 살아가려던 체념의 다짐은, 그 다짐의 실패 이후의 이야기인 ‘틈 속의 궁전’을 통해 계속해서 노래된다. 여전히 망각을 원하지만 봉합하려는 마음은 끝내 닫히지 않고, 작게 벌어진 틈은 기억과 그리움이 스민 통로가 된다. ‘틈’은 상처의 흔적이자 동시에 기억이 점철되어 살아가는 입구인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궁전’이다. 거대함과 화려함을 상징하는 공간은 신해경의 입을 통해 마음속 가장 작은 균열 속에 숨어든다. 무너지고 갈라진 마음속, 영겁처럼 이어지는 상실의 시간 한가운데 거대한 세계는 연약하고 미숙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러곤 상실은 메워야 하는 결핍이 아니라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공간이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 잊게 되면 그때 마르는 틈에 넘쳐내린 보고픔”이라는 구절은 역설적이다. 정말 모든 것을 잊는 순간조차, 그 틈에는 가장 깊은 그리움이 차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슬픔으로 예감하기 때문이다.
‘틈 속의 궁전’은 끝내 잊지 못하는 사람의 노래다. 전작이 감정을 지우려 애썼다면, 이번 작품은 지워지지 않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다. 신해경은 상실을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상실이 머물 자리를 마음속에 마련해 준다. 그렇게 생겨난 작은 틈은 어느새 한 사람의 삶을 이루는 가장 넓은 궁전이 된다. 그렇게 질문은 완성된다. 사람은 기억을 버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이 남긴 빈자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신해경의 이번 싱글을 들으며 스스로의 몸을 껴안아 본다. 그럼으로써 음악은 내 마음에 온전히 체화된다. 음악을 오래 붙들고 가사를 곱씹다 보니 어느새 외로워졌으나, 음악이 모두 끝난 후엔 끝끝내 우리 존재의 기원 깊이 스미는 감정에 따뜻해졌다. 고독함 끝에 매달린 메시지에 안도했다. 나는 오늘도 음악에 빚을 졌다. 그리고 탕감하듯 곡이 남긴 잔해 같은 기억을 더듬어 아련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글 / 조혜림 (대중음악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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