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내면이 황폐해져감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살다 보니 저의 노래 또한 각박해졌습니다.
하여, 어느 순간 멈췄습니다.
물리적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정서적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현실과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저의 생에엔 아름답고 편한 노래만을 부르고 싶습니다.
소원입니다.
2025. 더운 여름 날
01 일단 한 잠 푹 주무세요
‘소설을 쓰는 자로 살며 역사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볼 때가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할 수 있고 어떤 갈등과 고통을 피하려 애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와 결론은 인간의 의지와 예상을 벗어날 때가 많다. 그것은 허무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일어났고 해결됐으니까. 때문에 현명한 삶이란 오늘을 잘 마감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일도 마음에 박힌 작은 가시도 그렇게 해결되고 사라질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 한 편을 썼는데 멋있는 멜로디와 근사한 목소리를 입은 음악이 되어 새처럼 날아왔다. 단잠을 자고 맞이한 유쾌한 아침같은 노래. 역시 살고 볼 일.‘
-- 노래를 듣고 난 후 정용준 작가의 소감
어느 날 인터뷰 중에 내가 한 말을 듣고 기자가 ‘그것은 희망고문이 아닐까요?..’ 라는 반응을 보였다. 처음 들었던 ‘희망고문’이라는 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확실히 느끼고 확인한 것중 하나는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는 희망의 속도보다 느리다’는 것. 절망할 일도 아니며 더 나빠지지 않는 것에 위로받으며 조금의 분노와 허탈감을 가지고 능청능청 살아가는 것이 요즈음 내 세상살이의 자세다.
우연히 재미있게 읽은 짧은 소설 뒤에 작가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노래가 되었다. 희망고문에 시달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잃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기에, 무엇보다 건강해야 하기에... 여러분, ‘일단 한 잠 푹 주무세요~’
02개념연예인
운동권가수, 대중가수, 민중가수, 국민가수, 폴리테이너(?)....등등 별의별 호칭을 다 들어봤다.
개념연예인도 그 중 하나.
제발 그만 하시오들! 난 안치환이란 이름의 뮤지션이오! 아티스트요!
03오늘도 또 노동자가 죽었다네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당하는 사고와 비교하기엔 좀 죄송스럽고 민망하지만, 나도 무대에서 떨어져 크게 다칠뻔 한 적이 있었다. 내 순서를 마치고 어둡고 높은 가설무대에서 내려오다 발을 헛딛어 옆으로 떨어졌는데 다행이 허벅지에 찰과상만 입었다. 만일 밑에 그 어떤 구조물이라도 있었다면 끔찍한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화가 나기도 하고 안전시설에 둔감했던 행사 주최측의 관행이 지금은 좀 나아지기는 했는지 우려도 된다.
노동자는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당연히 가져야한다. 하지만, 그 길은 요원해 보이며 오늘도 내일도 노동자는 일하다가 다치거나 죽어갈 것이다. 왜? ‘내 일이 아니니까. 그러게 누가 그런 일 하랬냐고..’ 노동자임을 부정하고 존재를 배반하는 당신의 그 비겁하고 한심한 허위위식이 깨지고 부서지지 않는 한 그 비극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힘이 세다!’
04인간계
인류의 편리와 세력의 확장을 위한 기술과 문명의 진보는 어디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위에 인류가 끝날 때까지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내면과 정신의 진보는 축적되지도 발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여, 그저 두루 불쌍하지요...
05 아이러니
촛불의 힘으로 들어선 정권이라고 다들 말했다. 기대도 컸다. 이젠 좀 달라지겠지... 헛된 기대였다. 죽쒀서 개 준 꼴이라니... 이렇게 냉소적인 노래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실망감이 너무 커서 자연스레 나온 노래라니...
그저 네 편 내 편의 진영논리에 기대어 으르렁대고 짖어댈 뿐 꼭 해야 할 일은 모른 척 시간만 보내고 있다. 권력은 탐하는 자의 것이라지만... 너무 뻔하고 뻔뻔하다. 예나 지금이나 관종과 기회주의자들의 간교한 생명력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촛불의 힘, 시민의 힘, 진보의 힘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이러니다.
06 다크코어
이 노래가 노래운동과 저항가요의 뿌리에 닿아 있는 것인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그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그 불길하고 끈적한 기운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 안에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하여, 이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무덤에서 나와 날뛰는 강시에게 부적을 날리듯...
이 노래를 만들고 든 첫 생각은 ‘그래, 나도 B급으로 놀아보자’ 였다.
유튜브에 한참 열중할 때의 나였다. 급을 낮춰 노는 것은 별로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조용히 내조만 하겠다’ 던 가증스러운 기자 회견 때 입었던 복장이 하필 마이클 잭슨이 즐겨 입던 것과 같아서 떠오른 모티브다.
외모비하니 여성혐오니 시답지 않은 위선의 개소리들 집어쳐라.
선한 척 수작부리지들 마라. 그래서 삼년간 좋더냐?
모든 것은 시간이 증명해 주리라 참았는데 예상보다 그 시간이 일찍 와버렸다!
지금의 내란 우두머리가 대통령이 된 후 만들었다.
07 쪽팔리잖아!
청산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가 썩고 또 썩어 그 징그러운 생명을 유지하다가 급기야 헛된 망상과 주술의 악령에 사로잡힌 그 천박한 잡것들이 우리의 미래를 가리고 현실을 망치려 했던 황당한 시절을 겪었다.
그들을 기억하자. 그러나,
다시는 그 꼴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그 꼴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이 혐오라도 좋고 차별이라도 좋고
그보다 더한 그 무엇이라도 좋다.
다시는 그 꼴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이런 노래들 만들고 싶지 않다!
잘가라.
이 비루하고 불쌍한 영혼들아!
08 세상의 빛
우리의 인생에서 결단코 겪고 싶지 않았던 황당한 내란을 경험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해서, 문명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악에 대해서.
수많은 구호와 주장과 노래가 광장에 펼쳐지고 오랜 시간 함께 분노하고 연대하고 투쟁하여 저 끈질기고 비겁하고 더러운 큰불을 일단, 껐다.
하지만, 아직 세상은 메마르고 바람불어 언제든 잔불들이 다시 내란의 큰불이 될 수 있는 때.
사람들아, 다시는 그런 인간들 안보고 생을 마칠 수 있도록 두 눈 부릅뜨자! 빛을 밝히자!
09 껍데기는 가라
다시 말하지만 이미 완성된 문학작품의 정수, 시를 노래화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동안 많은 시들에 멜로디를 붙여왔지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은 포기한 시들이 여러 편 있다. 그 시들은 너무 유명하기에 노래의 완성도에 대한 부담이 클뿐더러 기대치를 스스로 만족시키기도 쉽지 않다. 그때는 과감히 내려놓는 것이 맞다.
이 노래는 4집에 수록된 ‘시인과 소년’ 이 후 신동엽시인의 시로 만든 두 번째 노래이다.
근현대사 한국의 가장 빛나는 시 ‘껍데기는 가라!’를 20여 년 동안 생각날 때마다 이리보고 저리 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벼락처럼 노래가 되었다. 완성하고 큰 성취감을 느꼈다. 큰 고지를 점령한 기분, 가장 높은 고개를 넘은 기분이었다.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강렬한 의지와 민족분단의 극복을 염원하는 최고의 시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곡을 붙였다.
이제 고개를 내려가 뜨겁게 노래하는 일만 남았다. ‘껍데기는 가라!’
10 You're Not Alone
한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일... 그 결과를 보고 누구는 기뻐할 것이고 누구는 슬퍼할 것이다. 누군가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라고 말했듯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주의니까!
이렇듯 총선이나 대선 때 늘 이해가 안가는 것은 국민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투표결과가 나올 때이다. 하여,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좌절의 쓰라림을 다독이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노래이다. 시간은 흐를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세상은 굴러갈 것이다. 다시 일어나 가야할 삶이다. 그대와 함께 가야할 삶이다. 당신도 나도 혼자가 아니다. ‘You're not alone!'
11 빨갱이
처음 이 노래를 만들게 된 동기는 당혹감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 내게 내뱉은 한마디 ‘빨갱이 새끼’. 노래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노력하던 한 뮤지션이 들어야 했던 그 말 ‘빨갱이’.
그 순간 나의 노래는 사라지고 없었다. 서정은 증발하고 그 자리엔 오로지 증오와 혐오만이 남았다. 음산한 이념의 찌꺼기가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들러붙었다. 누군가 툭 던진 그 말은 세치 혀로 가하는 비열하고 더러운 폭력이었다.
우리 근현대사를 통틀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말살한 가장 대표적인 말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꼽겠다. ‘빨갱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아프게 한 말, 이제 그만 사라져야할 말, 야만적인 인간들의 말.... 이제 그만 멈춰야 할 말. ‘빨갱이’
이전 음반에도 수록되었으나 세월을 거쳐 가장 마음에 드는 버전으로 완성해서 다시 실었다.
12 바이러스 클럽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금의 인류가 지구 전체적으로 모두가 함께 겪은 가장 낯설고 두려웠던 사건이자 경험일 것이다. 인류에겐 과거와 현재를 겸손하게 짚어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뼈아픈 성찰의 시기가 될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마스크는 이 역병의 시대가 끝나도 늘 달고 다니는 필수품이 되겠지만 마스크가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들의 시대는 이제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농담이다.
난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
13 봄이 오면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로 광주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노래한 시인 김준태 선생님의 이 시를 읽고 내 가슴에 촉촉하고 아련하고 짠한 기운들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 찬란한 오월에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존재 하나하나가 이토록 저리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평생 광주의 아픔과 정신을 지니고 살아온 노시인의 달관한 시선일까...
자연스럽게 멜로디가 입가에 맴돌았다. 악기의 도움없이 시만 보고 멜로디를 붙인 노래이다.
14 잠들지 않는 남도
1987년 대학 4학년 봄학기였다. 공강시간에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노래팀 동아리 방에 갔다.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 선배가 내게 다가오는 오월대동제 공연 주제곡을 만들라며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이 산하의 ‘한라산’...
제주 4.3 사건에 대한 노래극의 주제곡을 만들라는 ‘오더‘였다. 처음 접하는 내용이지만 광주 5월만큼이나 충격이었다. 한라산을 읽으며 4.3을 알아갔다. 광주시민처럼 외로웠을 제주도민들의 투쟁의 역사를... 그리고 며칠 후 ’잠들지 않는 남도‘가 만들어졌다.
2절까지 만들어졌으나 공연에는 1절만 쓰였고 그 후 악보로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여러 버전이 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지만 창작자의 선호 버전으로 재녹음하여 완결편을 내놓는다.
15백년의 함성
3.1 만세운동 백년을 맞이하여 만든 노래이다. 왠지 마음이 동해서...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나를 보면 꽤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인간의 내면에는 진보적이고 보수적인 양면성이 함께 있다. 어느 면에서는 진보적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나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다수의 대중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노래라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다수 대중의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자! 애국이란 말은 본래 좋은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