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와 배신이 뒤섞이고, 돌아오지 못할 길임을 알면서도 손을 흔드는 홍콩 느와르의 비장한 한 장면처럼. 혹은 파편처럼 몰락하는 무협지의 세기말 도시 이미지처럼, ‘죄악극성’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를 넘어선 무게를 지닌다. 죄악이 만연한 도시의 입구에 걸린 명패처럼, 앨범 속 영웅의 이야기는 짙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까치산이 말하는 영웅은 흔히 떠올리는 무한한 힘의 초인이 아니다. 피 흘리며 상처 입고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스스로 대의를 이룰 자격이 없다고 느끼면서도, 마음속 사랑과 신념을 위해 싸우러 나서는 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 속 껍질처럼 남은 자, 혹은 수많은 패전 끝에 결국 영웅이 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죄악극성》은 실패한 영웅들을 위한 앨범이며, 동시에 찬가이자 자조, 판타지이자 레퀴엠이다.
1번 트랙 ‘서문’과 2번 트랙 ‘죄악극성’은 한 쌍처럼 기능한다. 어두운 밤을 지나 새벽으로 향하는 서사의 기점에서 라틴어 레퀴엠이 울려 퍼지고, 불완전한 의지를 안고 절뚝이며 걸어오는 히어로가 비장하게 등장한다. EP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죄악극성’은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두려움 속에서도 맞서고야 마는 신념의 진격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 태도는 ‘절대적인 정의’가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무언가’에서 비롯된다. 더럽게 약하면서도 어떤 신념만큼은 놓을 수 없는, 눈물 나는 만화 속 답답한 주인공이자 판타지 속 안티히어로에 가깝다.
각 트랙은 ‘영웅’이라는 존재가 품은 서사적 긴장을 끊임없이 발현한다. ‘표정이나 가면 따위’는 영웅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연약하고 안쓰러운 내면을 드러내고, ‘소왕야’는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영웅이 될 수도 있었지만 끝내 악인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의 비극적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죽음을 알면서도 나아갈 수밖에 없는 만화 속 고된 원정대의 이야기처럼, 앨범에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온몸에 피를 흘리며 앞으로 가는 비극적 신념의 인물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디에 도착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계속 나아갔는가이다.
마지막 트랙 ‘영웅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는 세월의 흐름을 마주한 곡이다. 어느 선술집에서 구전되듯, 언젠가 잊힐 한 인물의 이야기가 곡을 통해 전해진다. 허세 섞인 수다, 부풀려진 무용담, 연기처럼 사라질 전설. 그러나 바로 그 연기 같은 것을 위해 영웅은 존재하고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완벽한 서사보다 신념과 대의 사이에서 웃고 우는, 처절하고도 인간적인 영웅. 이 노래는 그런 영웅을 이야기한다.
‘투니버스’로 기억되는 뉴밀레니엄시대 만화주제가의 벅찬 희망과 일본 전대물의 노스텔지어를 빌리고, 미국 팝-펑크와 시모키타계 음악의 질감을 포용해 완성한 까치산만의 ‘애니메이션 록’은, 선명한 테마 속에서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기타 리프를 중심으로 영웅스러움과 악당스러움의 간극을 오가며 밴드만의 판타지를 구현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이번 앨범은, 까치산이 말하는 영웅이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내는 출발점이자, 본격적으로 이름을 각인시키는 도약의 첫걸음이다.
영웅. 까치산에게 영웅은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를 구원하는 초인이라기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알고자 하는 개인의 고뇌와 태도 속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다. ’죄악극성’은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진심으로 임하려는 여러 인물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스크린이나 무대 위가 아니어도, 일상 속에서도, 우리 안에도 그런 영웅은 존재한다. 이 앨범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악극성’을 마주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손을 내민다. 당신의 노래가, 당신 스스로를 구원하길 바란다고.
조혜림 (대중음악평론가 / 콘텐츠기획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