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세계 대중문화사에 벽력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문학계 안팎에서는 ‘시, 소설 등 문학에만 평생을 진력한 작가들이 수두룩한데 가수에게 왜 귀한 영예를 주느냐’는 볼멘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모르는 소리다. 생각해 보라. 애당초 시는 노래였다. 노래는 시였다. 저 동굴이나 산들에 살던 우리의 먼 조상이 잔설 위로 푸르게 돋은 어린 잎사귈 발견하곤 ‘(마침내) 봄이 왔다!’고 할 때 그 외침은 언어와 운율과 가락이 한데 뒤섞인 구슬만 한 소우주, 어떤 구음(口音) 덩어리였으리라.
‘바람이 분다/서러운 마음에/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중)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중)
두 문장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시적인며 어느 편이 더 음악적인지 단언할 수 있는가. 시와 노래는 나란하다. 눈에 보이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잡을 수 없는 모호함으로 되레 우리 안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작동시키는 것들. 둘은 그 어떤 실재보다도 우리가 실재함을 보란 듯 증명해 내는 기특한 오누이다.
자, 여기 우리는 우리 대중문화사에 불어온 조용한 폭풍을 마주하고 있다. 김창훈의 ‘시노래’ 연작이다. 플라톤의 ‘향연’ 속 태곳적 인간처럼, 또는 성서 속 바벨탑 이전의 사람들처럼 하나였던 시와 노래는 활자와 녹음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속도로 멀어졌다. 두 개의 문화적 언어는 물론 김민기, 레너드 코언 같은 이들에 의해 지근거리에 공존하기도 했지만, 그래 봤자 친척쯤으로 치부됐다.
분리된 시와 노래를 애써 결합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때로 무도하다는 평도 듣는다. 김창훈의 선택은 왜 조용한 폭풍인가. 대수술을 집도하되 첨단의 장비나 예리한 메스 따위를 들지 않는다. 멀어진 두 친척 사이로 그저 시냇물처럼 소담스러운 선율과 화성을 졸졸졸 흘려 넣을 뿐이다. 먼 산과 먼 바다도 실은 어느 작은 골에서 이렇게 은밀히 다정하게 하나였던 것 아닌가.
시의 은유가 섬세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D7sus4♭9’이나 ‘Cmaj9♯11’ 같은 텐션 코드로 융단 폭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E, Am, C…. 작은 방에서 통기타 처음 배우던 때를 연상시키는 쉬운 코드들로 담백하게 곡의 뼈대를 얽었다. 김창훈의 음성은, 선율은 오래된 전래 동요처럼 군다. 구수한 옛날이야기 들려주는 배추 도사, 무 도사처럼 사근사근 시의 한 음절, 한 구절을 길어 올린다.
소박하다 해서 흔한 음식은 아닐 터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맞겠다. 투박한 메주처럼 지은 김창훈의 시노래들은 밤하늘에 띄운 수많은 풍등에 비하고 싶다. 하나하나 위태롭지만 거기 담긴 꿈만은 보이저호의 골든 레코드처럼 원대할 것이다. 시노래의 물길이 언젠가 강을 만나 그 뜨끈한 언어의 향을 천지에 퍼뜨리는 꿈. 제아무리 화려한 꽃과 나무도 그 씨앗은 단출한, 그 의미를 알기에 김창훈은 노래에 허튼 멋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김창훈이 선택한 시는 18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120년 세월을 넘나든다. 김명순, 나혜석 같은 근대 여성 시인들부터 윤동주, 이육사, 백석 같은 교과서로도 친숙한 민족시인을 거쳐 나태주, 정현종, 문태준 같은 동시대의 시인들까지 그 스펙트럼이 실로 넓다.
1000개의 시로 1000개의 곡을 만든 음악가가 또 있었던가. 슈베르트가 600개 넘는 예술 가곡을 쓰며 괴테, 실러 등의 시에 멜로디를 얹은 바 있지만 일단 규모로서 김창훈의 시노래에는 못 미친다. 시노래가 아니라 그냥 준수한 악곡을 1000개 이상 지은 것만으로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현재까지도 칭송받고 있으니, 김창훈의 시노래는 꽤 특별한 기록이다.
이 대형 프로젝트도 그 시작은 시냇물 같았다. 이 음반의 첫 곡이기도 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 첫 곡이었다. 때는 2021년 5월 23일. 시노래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할 때도 꾸준히 100곡이나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2023년 5월 19일, 이 장정은 제500곡(김경린의 ‘어머니의 하늘’)에 다다른다. 뒷산이나 오르자고 나선 길이 백두산 천지쯤까지 이어진 격이랄까. 그해 5월 29일 서울 마포구의 공연장 ‘벨로주 홍대’에서 500곡 완성 기념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한 번 모터를 단 노래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2025년 6월에는 마침내 1000곡이라는 위업에 가닿는다.
그렇다면 김창훈은 인생의 활력 호르몬이 정점에 있는 약관의 가수인가? 미안하지만 결코 아니다. 1956년생이다. 칠순의 싱어송라이터다. 그가 도대체 누구인가.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인 ‘나 어떡해’(샌드페블즈)를 작사하고 작곡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해 형 김창완, 동생 고 김창익과 3형제 밴드를 결성하니 그 이름이 ‘산울림’이다. 베이스기타 연주와 작곡을 담당한 김창훈은 산울림 노래 중에 ‘회상’ ‘산할아버지’ ‘내 마음은 황무지’ 등을 만든 이다. 김완선의 ‘오늘 밤’과 ‘나홀로 뜰앞에서’도 김창훈의 작품이다. 1980년대에 취직해 전업 음악가에서는 멀어졌지만 이따금 산울림 멤버, 솔로 가수로서 활동을 이어왔다. 2010년대 후반, 은퇴 후 완전히 귀국한 뒤로는 록 밴드 ‘블랙스톤즈’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1000곡의 시노래 가운데 엄선해 담은 10곡은 김창훈이 현재진행형의 가객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첫 곡 ‘방문객’을 어는 ‘사람이 온다는 건’의 일곱 음을 들어보라. 산들바람 같은 셔플 리듬에 올라탄 그의 음성은 뭉근한 멜로디를 마치 찻잔 위 여린 잎처럼 오선보 위로 살포시 띄워 올린다. 카페인 중독의 시대에 묽은 녹차 향처럼 퍼지는. 대항해의 시대에 앞 개울 물수제비 같은 단아함으로 울리는 선율들….
둘째 곡 ‘오리’의 보폭도 다르지 않다. 5리(五里)씩, 5리씩 나아가 찔레꽃까지 걸어갈 때까지 선율의 굴곡은 함부로 드라마를 짜 넣지 않는다. 클라이맥스(climax)도 후크(hook)도 곁눈질하지 않은 채 덤덤하나 매력적인 음표를 한 땀 한 땀 수놓아 간다.
덜컹대는 컨트리 송 ‘숭어 한 마리’는 이야기 속의 ‘여시구렁’이나 ‘후들거림’을 능청스럽게 싣고 시절의 배에 돛 단 듯 달려간다.
넷째 곡 ‘저물녘’은 노을과 이별, 실존하지 않는 어떤 역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도 김창훈은 맨손 체조처럼 순정한 선율로 걸어가되 ‘놓여 있었네’의 툭 놓는 하향 선율이나 ‘털어내면서’의 여울지는 멜로디로 교묘하게 감칠맛을 더한다. 내공 있는 노포의 은근한 손맛이라고나 할까.
중반부에 이르면 분위기가 전환된다. 다섯째 곡부터 여덟째 곡까지의 ‘단조(minor) 구간’이다. 그 첫 트랙인 ‘묘생2’는 살짝 재즈적인 비감에 행진곡풍 리듬을 가미하면서 ‘사랑한다는 문장이나 핥아야지’의 비참한 묘생을 이면도로의 귤색 가로등처럼 조명한다.
여섯째 곡 ‘애절’은 이 음반의 첫 번째 심연이다. 완연한 단조 선율은 가히 비장한 현악과 피아노와 함께 흘러간다. ‘견딜 수 없는 이 짙음을/하얗게 견디라 하네’를 노래하는 김창훈의 음성은 투명한 차창이 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탄 설원의 고인(高人)을 비추는 듯하다.
봄비 오는 밤에 피어버린 붉은 모란에 대한 일곱째 곡 ‘다시는 못 볼 것처럼’은 두 번째 심연. 진혼곡 같은 리듬 위로 피아노와 현악이 흐르는 동안 김창훈의 선율은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처럼 걷는다. 곡 중반에는 ‘축축한 저 건너편’에서인 듯 눅눅하게 울려오는 북소리가 묘한 공간감을 형성한다.
‘좋겠다’는 변형된 보사노바 리듬이 지닌 적정량의 경쾌함으로 중반부의 골짜기를 벗어나려 한다. 시외버스에 몸을 실은 인간군상을 에드워드 호퍼처럼 회화적으로 묘사한 시어들. 앨범에서 가장 도시적인 편곡은 예스러운 선율과 대비를 이루면서 마치 도시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말 못 할 서정을 점묘하는 것 같다.
‘정말 그럴 때가’는 템포감 있는 모던 록이다. 이제 다시 양달로 나왔단 의미다. 이 곡은 흡사 세기말과 세기초를 풍미한 북아일랜드의 체임버 팝, 바로크 팝 리바이벌 밴드인 ‘디바인 코미디’를 연상케 한다.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떨어진 단추에 대하여/빗방울에 대하여’ 관조하기에는 비가 그린 동심원 같은 이런 악곡이 제격이다.
마지막 곡은 앨범의 표제곡이기도 한 ‘당신 아프지마’다. 음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드럼 비트가 앞으로 나서는 곡이다. 마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사려 깊은 미디엄 템포 같은 소프트 록이다. ‘세상살이 힘들고 고달픈 날’을 톺고 ‘내 영혼의 피로 시를 쓸게요’라 토로하는 결기 높은 시어들을 김창훈은 긍정적인 장조와 처지지 않는 비트에 담아 한 자 한 자 꾹꾹 써내려 간다.
결코 붓끝에 힘을 주지 않으면서 수채화 같은 밑그림을 받쳐낸 편곡자 아이디얼스(ID:Earth)의 도움도 특기할 만하다.
여기 실린 10곡은 1000곡의 산을 향해 놓은 현수교일 뿐이다. 그 산은 구름 너머 아스라이 보인다. 초고속 이동통신, 글로벌 네트워크, 고화질 카메라를 손안에 들인 시대이므로. 인류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 시각의 절대권력이 휘황한 전제군주의 시대이므로. 부디 이 작은 활자와 청각 예술의 반딧불들이 홀씨를 실어 날으길, 한 떨기 민들레로든 아름드리 단풍나무로든 피어나고 자라나기를 풍등을 바라보듯 바라본다.
아니, 실은 거대한 시작이 아니어도 좋다. 어떤 노래는 피고 진 흔적만으로도 족하다. 다음에 오는 봄에는 봉숭아물을 들여보고 싶다. 시노래에 한 계절 흠뻑 적셔둔 손톱달에 새로운 색깔을 칠해보고 싶다.
임희윤 음악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