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출신의 피아니스트들의 선전이 눈부시다. 손열음을 제외하면 대부분 20대 초반 남자 피아니스트들로 임동혁, 임동민, 김선욱 등의 공연에 가보면 가요계 스타의 콘서트를 방불케하는 팬들의 괴성과 열정으로 공연장이 시끌시끌하다.
여기에 한 사람의 이름을 더 추가해야겠다. 지난 2006년 3월,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기 전부터 가진 첫 내한무대에서 전석매진을 기록하고 그해 가을, 독일 ARD 콩쿨 피아노 부문 1위를 기록한 벤 킴이 그 주인공이다. 꽤나 실력있는 피아니스트에 대한 소개를 외모에 초점을 맞춰 시작하니 좀 미안한 감은 있지만 전업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이 미소년의 존재는 어쨌든 외모 덕에 매우 빠르게 알려졌다.
벤 킴(한국명 김진수)은 미국 오레곤주에서 태어난 재미교포로 5세때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고, 8살 때 첫 독주회를, 그리고 12살 때 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가졌다. 피바디 음악대학에서 레온 플라이셔 문하로 학사 과정을 마친후 플라이셔와 문용희 교수를 사사하며 아티스트 디플로마 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레곤 심포니,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해왔다. 2000년에는 영 아티스트 월드 피아노 콩쿨 그랑프리를 받았고, 피바디 음악원에서 열린 2004 예일 고든 피아노 콩쿨 우승, 뉴욕의 Kosciouszko 재단 쇼팽 피아노 콩쿨과 MTNA 내셔널 피아노 콩쿨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지난 2005년 임동혁, 임동민 형제가 공동 3위 입상한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국제 콩쿨에서는 본선 32명에까지 진출하였고 가장 최근인 2006년, 권위있는 세계적인 콩쿨인 독일 ARD 국제콩쿨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리차드 구드나 메나햄 프레슬러, 푸총, 존 페리, 드미트리 바슈키로프 등의 마스터클래스에도 참가하며 카네기홀, 케네디 센터와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 등지에서 수차례 독주회를 가진 그는 지난 2006년 3월, 국내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었다. 당시 벤 킴은 이전까지는 국내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신인이었지만 그를 소개하는 월간지, 일간지에는 그의 음악적 가능성을 극찬한 레온 플라이셔, 강충모, 문용희 교수의 멘트가 소개되면서 빠르게 알려졌다. 레온 플라이셔는 “내 직감에 그는 최정상급 연주자로 커리어를 쌓아나갈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녔다”고 하였고, 문용희 교수는 “보기 드물게 재주있고 총명하고 탁월한 감각을 지닌 피아니스트”라고 하였다. 여기에 2005년 바르샤바 쇼팽 콩쿨의 심사위원이었던 당 타이손은 “지난 쇼팽 콩쿨에서 내가 들은 가장 지적인 연주는 벤 킴의 연주”라는 말을 남기며 비록 결선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던 벤 킴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실력을 가진 인물인지 뉴 페이스의 연주는 더욱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공연과 비교할 때 특별히 더 홍보한 것도 아니었지만 공연 당일 티켓은 매진이었고, “월간지에 소개된 사진을 보고 연주가 궁금해 들어보러 왔다”는 소녀팬들과 그의 연주가 궁금해 찾아온 공연 업계 주요 인사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며 공연장은 보조석까지 가득 메우게 되었다.
이날 프로그램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번,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장송행진곡’,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이었다. 소문 난 잔치에 먹을게 없다고 큰 기대는 안했지만, 벤 킴의 연주는 그 즈음 가봤던 피아노 무대 중 가장 인상적인 무대였다. 우선 모차르트는 매우 신선했다. 간만에 들어본 맘에 드는 모차르트 음색으로 말끔하고 세련된 터치와 톤도 아름다웠고 맑고 건강한 청명한 느낌이 머리와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드뷔시도 좋았다. 평소 스타일이 없는 드뷔시 연주에 지루해 했었는데, 그 곡을 살려내는 감각은 타고난 것 같았다. 센스있는 연주 덕에 ‘베르가마스크’라는 곡의 멋스러움이 새삼 다르게 들렸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장송행진곡’은 모차르트와 함께 이날 가장 좋게 들었던 연주. 슈만 연주가 더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명해서 익숙해진 ‘장송행진곡’ 각 악장의 캐릭터를 좀더 살려냈다. 보통 격정적으로 혹은 신나게 연주하는 2악장에서 오히려 시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3악장 표현에서는 필요이상의 무게는 덜고 건반을 누르는 단호한 깊이감이나 음표 속에서 얘기하려는 덩어리를 강조하며 표현하는 등 뭔가 꿈틀거리는 연주를 들려주어 아주 좋았다. 사람마다 느낌은 다양했겠지만 그날 연주에 왔던 사람들은 모두 밝은 얼굴로 혹은 놀라운 얼굴로 벤 킴의 연주에 큰 호감을 나타냈다. 그래서인지 독주회 이후 그가 독일 뮌헨 ARD 국제 콩쿨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은 더욱 반가웠고, 그 많은 사람들도 벤 킴의 음악에 공감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 같아 흐뭇했다.
2006년 독주회 때의 연주가 좋아 메모를 남겨놨었는데, 재미있게도 이번에 벤 킴이 선보이는 앨범의 레퍼토리는 독주회에서 소개했던 모차르트와 쇼팽, 드뷔시의 곡이다. 쇼팽 소나타 2번 ‘장송행진곡’을 첫 곡으로 모차르트의 소나타 E플랫 K.282, 모차르트 소나타 2번 F장조, K.280,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등을 담았다. 뮌헨 콩쿨이 끝난 직후 미국에서 녹음한 음원으로 현재 그가 한참 몰두해 있는 리사이틀 레퍼토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쇼팽의 소나타는 현장에서 들었던 연주보다는 깊이감이 좀 덜 전달되는 것 같아 약간 아쉽지만 이것은 그날의 인상 깊었던 연주와 비교하는 차원에서의 얘기이고 여전히 벤 킴의 쇼팽은 다시 들어도 괜찮다. 그가 다루는 왼손의 느낌도 귀기울여 들어보자. 약간의 루바토를 섞어가며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요지를 들려주는 해석은 과장이 넘치지 않아 좋다.
모차르트 2번은 다시 들어도 느낌이 좋다. 콘서트 때 연주가 상당히 큰 인상을 남겼는지 이것 역시 그날의 연주만큼은 아니어도 음반에 실린 2번 소나타는 벤 킴이라는 연주자가 곡을 다루는 아주 미세한 감각까지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연주회에서 너무 강한 인상을 받아서 그랬는지 음반에서 조금 덜 와닿게 들리는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짧은 곡들 모음이어서 대작의 감동과는 다른 차원이겠지만, 이 곡은 벤 킴이 작은 곡을 얼마나 아기자기하게 다룰 줄 아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인 연주자의 음반을 놓고 절대적인 평가는 되도록 맹신하지도 말고 스스로 결론짓지도 말아야 할 것 같다. 특히 실황과 음반을 들을 기회가 있다고 할 때, 음반보다는 실황을 들으며 연주자와 함께 호흡하는 것을 더 권하고 싶다. 음반은 실제 연주에 대한 대치물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나 평가를 단정짓게 만들면 안된다. 특히나 신인일 경우에는 더더욱...
벤 킴은 오는 4월에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이번 독주회에는 우리나라 10팬들은 물론 일본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벤 킴의 연주를 찾을 것 같다. 음반도 좋지만 이제 음악회에서 벤 킴을 만나보면 좋겠다. 그의 다음 레퍼토리는 슈베르트 소나나 a장조 D.537,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중 <마제파>,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6번 A장조 등을 선보인다. 다음 음반 프로그램 목록이 될지도 모르지만 서정적인 슈베르트와 성격적인 리스트, 프로코피예프 연주로 감성의 폭을 넓히는 벤 킴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무척 궁금하다.
[보도자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