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이 친동생 김창훈, 김창익과 함께 만든 그룹 '산울림'은 실제로 직업적인 락그룹이 되기 위해 앨범을 만든 건 아니다. 1972년 경에 그가 집에 500원짜리 기타를 들고와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른 것이 음악의 시작이었다. 얼마 후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장만하자, 할 것이 없는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드럼 흉내를 내면서 그들의 음악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77 대학을 졸업(서울대 농대 잠사학과)하면서, 그동안 작곡을 하였던 약 150 여곡들이 아까워서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기분으로 그들은 한 장의 앨범을 내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을 허락했고, 녹음날 취직시험이 있던 그는 과감히 녹음을 하기로 결정하고 녹음한 것이 바로 '산울림'의 탄생이었다. rock이 그다지 대중화되지 못한 70년경에 '산울림'의 "아니벌써"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국내 가요계를 흔들어 놓았고, rock의 대중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집의 '산울림'은 다시 한번 앨범을 낼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집 "내마음의 주단을 깔고"이고, 이 앨범은 '산울림'을 국내가요계의 앞서가는 그룹으로 완전히 자리 굳히게 한다.
1979년 창훈과 창익의 군입대로 인한 공백기를 거쳐 1981년 7집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 무렵에는 "산할아버지" "개구쟁이"등 어린이를 위한 세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이 노래들은 지금도 각종 모임과 운동경기에서 단골로 불려지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1983년 산울림은 9집을 끝으로 해체했다. 두 동생은 사회인이 되었고 맏이인 그만이 산울림의 이름으로 3장의 음반을 내는 등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신인들을 모아 '꾸러기들'을 결성하여 최성수, 임지훈, 윤설하, 현희, 신정숙 등을 길러냈다. "꼬마야" "고등어" 등 히트곡도 냈다. 그의 음악은 20년이 흐른 지금도 산울림의 연장선상이다.
'산울림'의 78년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첫 공연은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는 소동을 벌였고, 관객들이 던진 꽃으로 무대가 뒤덮이는 소동을 벌이는 등 많이 화제를 낳았다.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음악정신에 젊은이들의 열광이 따랐다. 77년생 아이는 '산울림동이'로 불렸을 정도이니 인기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83년 활동을 중단한 이후 14년만에 본격 활동을 선언하고 나섰다. 삼형제 록그룹 '산울림'의 복귀는 신선함과 충격 이상이다. 산울림은 90년대의 록 평론가들에 의해 신중현과 들국화와 더불어 한국록 역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문제적 데뷔 앨범'으로 평가받는 산울림 1집이래 '산울림'이란 이름으로 작년까지 13집이 출반 되었다. 네 개의 동요앨범, 두개의 독집도 그의 앨범목록에 올라 있으며 그의 음악은 어떤 장르에 있더라도, 상투적인 문법을 거부하는 창의성으로 빛난다.
'산울림' 음악의 전반적인 관심은 '인생'이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2집부터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좀더 깊은 주제에 관해 젊은이들이 관심을 보이게 되면서 산울림 음악을 좋아아하게 되었다. 우리말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해서, 노랫말도 참신함을 지니려고 노력했다.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사용해 위트와 파라독스가 생동감 있게 표현된 노랫말은 우리 가요계의 발전에 커다란 시금석이 되었던 사건이다. 특히 산울림의 앨범 자켓은, 자켓의 1/4이 조금 넘는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왼쪽 중간에 있고, 그 오른쪽에는 '산울림'이라는 특이한 글씨체로 그들의 그룹명을 적어 놓았는데, 12장의 정규앨범들이 나오면서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만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 가수의 사진을 앨범 자켓에 싣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앨범 자켓에서도 그들은 앞서 가고 있었다..... ....
Trackback from :: 상지니어스!! :: 2013-02-11 00:09
Subject : 산울림 2집
아니벌써 아티스트 산울림 타이틀곡 아니 벌써 발매 1977.12.15 https://www.evernote.com/shard/s52/sh/2fcd24f9-5057-46b3-a41c-7daec8ecd946/61b83959f95951bb83b2889a515da9e9 LP, mp3로 소장 역시 엘피로 들어야 제맛이 나는 앨범이 아닌가 싶다! 황학동에서 2500원에 구입! 상태는 ㅠㅠ...
산울림의 노래이나
6월 26일을 기해
이 노래는 승열 오라버니의 노래가 되버렸다.
산울림 버전으로 듣고 있으나
승열님 목소리로 바뀌어 들린다.
그래서 히죽대며 웃다가 머리에 꽃 단 여자 취급받은 1인.
참. 언제 공연 때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우리 승열 오라버니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를 ’늦은 가을’ ’늦은...
한국 록의 역사에 산울림의 등장은 일대 사건이다. 신중현에게서 시작된 한국 록은 산울림으로 인해 두세 단계 뛰어 넘은 지점으로 진보했다. 1977년 데뷔앨범 ‘아니 벌써’로 혜성과 같이 등장한 산울림은 6개월 만에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발표, 전설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이 데뷔앨범과 2집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록의 진정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런 점이 산울림의 ...
음악을 듣다보면 ’어, 이런 음악이 어떻게 그 시절에 나올 수 있었지?’하는 의문이 들때가 가끔 있다. 뭐, 이런 기분 좋은 당혹감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 시절에도 이런 음악이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일까?’하는 낭패감으로 바뀌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우리 대중음악 역사에서 저런 뮤지션을 꼽는다면 하나는 들국화, 다른 하나는 산울림이 되겠다. 서태지는 글쎄, 그들의 음악은 ...
01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산울림의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나온지 딱 30년이 되었네요. 역시 진보적인 작품들은 시대가 지나도 더더욱 새롭게 들리나 봅니다. 이 노래를 처음들었던 국민학생 시절에도 매우 좋아했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들어도 여전히 좋습니다. 아니 지금들으니 그 당시의 실험정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네요. 도입부분의 도도한 베이스 기타의 전주를 시작으로 곧바로 도도한 연주...
꽤 예전에 뮤지스탤지아에 나왔던 곡. 그 때도 이 곡 들으면서마음이 찌잉~ 했는데 오늘은 더 그렇다.산울림의 멤버인 김창익씨가 어제 캐나다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 때문에 그런 듯.산울림의 음악을 특별히 여기고 좋아한 건 아니지만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음악이어서산울림 노래 들을 때면 옛날 일들이 조각조각 떠오르곤 했다.이 노래는...
1977년 록밴드의 음악으로 창작, 연주 면에서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산울림은 가히 ‘한국 록의 시작’으로 불릴 만하다. 그리고 이는 신중현이 ‘한국 록의 대부’라기보다는 ‘한국음악 창작자의 역사에서 시작’으로 불리는 것이 타당함을 생각한다면, 또한 실질적으로 산울림의 록 음악부터 음악 마니아들의 현재적인 감성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상기한다면 산울림을 진정한 ‘한국 록의 시작’으로 불러도 ...
산울림의 데뷔앨범을 섹스 피스톨스의 그것과 연관시키는 평자들은 흔히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곤 한다. 두 앨범이 같은 해에 발매되었으며, 아마추어리즘을 바탕으로 주류 음악계를 뒤흔들어놓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같은 외적 조건의 유사성만으로는 이 앨범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측면을 왜곡시킬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요컨대 이 앨범은, 정치적 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 미...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산울림의 데뷔는 파격적인데, 이는 전대 뮤지션들과의 음악적인 연결고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미권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그다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고, 특히 1~3집에서 보여준 퍼지톤 기타와 오르간의 독특한 어울림과 그 안에서 형성되어 나오는 그루브는 이전에도 없었지만 이후에도 찾기 어렵다. 특히 70년대 말 암울했던 ...
일시 : 2005년 5월 28일 19시 장소 : 장충체육관 산울림의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긴 세월의 음악을 음미한다는 것, 3명의 멤버가 다시 모였다는 것 이상의 감흥은 없었던 공연이라고 할까요?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해오신 분들과 비할바는 아니지만, 엉성한 연주, 엉성한 보컬 등 교내 밴드 수준도 안되 보이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 눈에 밟히더군요 산울림에...